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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이름의 도시〉

일차로 2025. 4. 16. 08:25

 


 

희미한 빛이 어두운 방을 스쳤다. 형광등은 간헐적으로 깜빡였고, 습기 찬 콘크리트 벽에는 검은 곰팡이가 퍼져 있었다. 남자는 눈을 떴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고, 입안은 바싹 말라 있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자신이 누구인지, 왜 여기 있는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바닥에 흩어진 종이 조각들이 바스락거렸다. 하나를 집어 들자, 거기에는 흐릿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산을 넘지 마라. 기억은 너를 삼킨다."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방을 나서기 위해 문고리를 돌리자,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바깥은 회색빛 도시였다. 하늘은 늘 흐렸고, 거리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없었다. 마치 이곳 전체가 시간에 갇힌 유령 도시 같았다.

그는 도시를 걸었다. 가끔 간판이 붙어 있는 가게들이 있었지만, 모두 문을 닫았고 창문은 안에서부터 칠해져 있었다. 어느 상점의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본 순간, 그는 흠칫 놀랐다.

익숙하지 않았다.
그 얼굴은 그가 알던 얼굴이 아니었다.

그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일어났군요.”

그는 고개를 돌렸다. 골목 끝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검은 코트를 입고, 눈동자는 어두웠다.

“당신은... 날 알아요?”

여자는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그 사람이 아니에요. 아니, 지금은 아닙니다.”

“무슨 뜻이죠?”

“기억을 잃은 건 단순한 사고가 아니에요. 당신은 어떤 선택을 했어요. 과거를 지우고, 이 도시로 돌아온 거예요. 여기는 '네크라', 기억의 끝에 있는 도시예요. 여길 나가려면, 당신은 기억을 되찾아야 해요.”

그녀는 작은 카드 하나를 내밀었다.

[도서관 – 기억의 열쇠]

그는 카드를 쥐고 걸었다. 도시는 마치 미로처럼 얽혀 있었고, 사람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누군가는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시선을 느꼈고, 골목 뒤편에서 무언가 빠르게 움직이는 소리도 들었다.

도서관은 도시 중심부에 있었다. 거대한 첨탑 형태의 건물은 마치 교회처럼 보이기도 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먼지 냄새와 함께 오래된 책 냄새가 퍼졌다.

사서가 그를 맞이했다. 키가 크고, 눈동자가 유난히 밝은 남자였다.

“당신은 두 번째군요. 이곳에 온.”

“첫 번째는 누구였죠?”

“당신이 찾는 사람. 그리고 당신이 원래였던 사람.”

남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사서는 책 하나를 꺼내 건넸다. 겉표지엔 아무 글자도 없었다. 하지만 책을 펼치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페이지마다 그의 과거가 기록되어 있었다.
그의 어린 시절, 첫사랑, 배신, 도망, 그리고 실험.

“이건... 내 기억인가요?”

“기억은 당신의 것이기도 하고, 타인의 것이기도 해요. 당신은 한 실험에 참여했죠. 기억을 서로 주고받는 실험. 네크라는 그 실험의 부작용으로 생긴 장소입니다. 기억이 정체되어 흘러가지 못하면, 이렇게 한 공간에 갇히게 돼요.”

그는 충격에 빠졌다. 자신이 기억을 잃은 이유가 자발적인 선택이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돌아갈 수 있나요?”

사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으면, 문이 열릴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결정을 해야 합니다. 지금의 자신을 버리고 과거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이곳에 남아 새로운 존재로 살아갈 것인지.”

남자는 책을 덮고,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그는 마지막으로 도시에 눈을 돌렸다.
회색 도시. 멈춘 시간.

도시 바깥으로 향하는 산길이 있었다. 처음의 경고가 떠올랐다.

"산을 넘지 마라. 기억은 너를 삼킨다."

그는 잠시 멈췄다가, 입술을 굳게 다물고 한 걸음 내딛었다.
산을 향해. 과거를 향해.

그리고 이내, 안개가 그를 삼켰다.